53. 여성의 손톱지우개 아세톤으로 건국한 나라 이스라엘

3.9.2012.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의 건국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이 선택하고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의한 건국 과정입니다.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는 세계사를 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학창시절에 배운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최소한 만 언급하겠습니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의 글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은 쓰지 않습니다. 제 수준이 평균 이하기 때문에 어려운 글은 쓰지 못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4년 4개월에 걸친 세계 최초의 세계 대전입니다. 전쟁의 발단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한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세르비아 출신의 대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 친선 방문했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호엔베르크 소피아 황태자비를 암살합니다.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이 한편이 되고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등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을 설명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오스만 제국 때문입니다.

오스만 제국 또는 오토만 투루크 제국(Osman Turk Empire)은 13세기 말에 지금의 터키 땅을 중심으로 오스만 1세(1258 ~ 1326)가 투루크 족의 이슬람 국가를 세우면서 시작됩니다.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아래의 지도를 보시듯 중동지역 대부분을 통치하였습니다.

아래에 당시의 지도가 다시 나옵니다. 위의 지도와 비교하여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지금의 터키(당시에는 ANATOLIA 지역)에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일부 지역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광범위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에서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독일을 공격하기 위하여 오스만 제국의 분란을 조장합니다. 당시 아랍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하에 있었으므로 독립 국가를 원했습니다.

맥마흔 선언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점령하에 있는 아랍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지원하면서 영국 편에서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의 독립 국가를 건설해 준다는 약속을 합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 땅에는 아랍의 여러 종족이 모여 살았습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살았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10여 차례에 걸쳐 영국의 고등 판무관 맥마흔(Henry Macmahon)이 아랍인들에게 약속한 서한을 맥마흔 선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 땅 따먹기 위한 영국의 사기였습니다. 세계사를 공부해 보시면 영국인들이 신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이크스 – 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 1916년)

영국은 겉으로는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인들을 속이고 뒤로는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아랍 국가를 둘이서 나누어 먹기로 합니다. 현재의 이라크와 요르단 지역을 영국이 먹고,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프랑스가 먹기로 약속합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지역과 쿠르드족 지역을 차지하기로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공동 관리하기로 약속합니다. 이 협정을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 경과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 이름을 따서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이 협정이 공개되게 됩니다. 아주 신사들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의 땅따먹기가 얼마나 기가 막힌 지 한 번 더 보실까요? 이 비밀협정을 이탈리아가 눈치채고 나도 달라고 떼를 씁니다. 할 수 없이 1917년 4월 생장드 모리엔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에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남부를 주기로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땅 따먹기 한 지도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땅이었습니다. 맨 위의 지도와 똑같습니다. 비교하면서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계속해서 전혀 신사답지 않은 영국의 비열한 짓을 보시겠습니다. 영국은 아랍 국가들의 전쟁 참여를 설득하기 위하여 영국 정보국 소속의 장교를 아랍에 파견합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입니다. 본명은 Thomas Edward Lawrence(1888-1935)입니다. 우리는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만든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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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중위

로렌스 중위는 대학에서 아랍 문명에 관한 공부를 하였고 아랍어에 능통했습니다. 진정으로 그들 문명을 존경했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당시에는 오일이 개발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아랍인들의 사막 생활은 순박함 자체였습니다. 영국 정부가 자신을 이용하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자세히 기록하지 않아 깊은 그의 생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영국에 우호적인 파이잘 왕자와 힘을 합쳐 전쟁을 준비합니다.

아랍인들 역시 똑같은 이슬람이지만 지배자인 터키인(오스만 투르크)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적 이질감과 점령자들의 독재가 싫었던 것입니다. 사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터키 친구에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머리는(생각) 유럽이고 몸은 아시아다.”라고 했더니 박장대소했습니다. 사실 지도를 보면 터키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동로마제국 수도)은 그리스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로존에 들어가기 위하여 여러 차례 노력하였으나 다른 나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다가 역사적으로 껄끄럽기 때문일 겁니다.

로렌스는 아랍의 독립을 위하여 큰 꿈을 안고 아랍에 도착하였으나 아랍인들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반면 오스만 종족은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랍의 베두인족은 사막에서 태어나 낙타나 타고 양치면서 순박하게 살던 사람들이 전쟁을 치러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렌스는 유목민들에게 적합한 “게릴라(Guerrilla)” 전을 펼칩니다.

게릴라란 스페인어로써 스페인 국민이 나폴레옹 군대가 쳐들어올 때 각지에서 일으킨 저항 전을 말합니다. 훈련된 정규군이 아니고 마음만 앞선 오합지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정규군을 앞설 것입니다.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 전으로 쿠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을 보면 정신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 게릴라와 비슷한 “빨치산”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나온 말로서 원래는 파르티잔(Partisan)입니다. 동지, 유격대원 등의 뜻으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은 빨치산 부대를 연대와 여단규모로 크게 운영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을 기점으로 한 빨치산 활동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로렌스는 오합지졸의 병력을 탁월한 작전지휘를 하면서 파죽지세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하여 자치 의회까지 구성하도록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얼마나 로렌스가 작전에 능하고 용감했으면 아랍인들이 그에게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경계인으로서 심한 갈등과 자괴감에 빠집니다. 아랍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반대로 모국인 영국의 침략 전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지역을 나누어 통치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랍인들 또한 영국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로렌스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랍인들은 그를 진정한 형제로 생각했고 많은 부족장은 그를 존경했고 수많은 아랍전사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결국 독립은커녕 다시 영국에 지배당하고 심지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까지 건국하게 하여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지금의 중동 화약고를 만든 장본인이 영국이기 때문입니다. 아랍인들에게 로렌스는 세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간첩이라는 말입니다.

아세톤(Acetone) 개발

영국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전쟁 물자와 전투력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대표적 유대인인 로스차일드를 끌어들입니다. 당시 영국군은 영국이 개발한 탄환을 사용했는데 불량이 많아 명중률이 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불발탄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함포 사격에서는 불과 몇미터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비축했던 탄환마저 고갈되었습니다. 결국, 당시 사령관이었던 데이비드 베티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세톤의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영국은 탄환을 영국의 화학자 프레데릭 에이벌과 제임스 듀어가 개발한 무연화약인 코르다이트 화약으로 만들었는데 만드는 과정에 바로 아세톤이 필수 요소였던 것입니다. 아세톤의 성분에 따라 화약의 성능이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영국군은 아세톤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전쟁 전에는 독일로부터 수입하였으나 지금은 적군으로 싸우고 있으니 수입 통로가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직접 아세톤을 제작했으나 아세톤은 밀폐된 용기에 나무를 넣고 가열하여 생성된 수증기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써 아세톤의 양이 너무 적었습니다. 또한, 대량의 아세톤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삼림이 필요했으나 당시 영국은 목재도 부족하여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영국의 수송선박들은 격침되고 영국군의 위기가 점점 닥쳐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영국군에 희소식이 날아듭니다. 전쟁 당시 군수 장관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맨체스터 가디언지의 찰스 스콧 편집장으로부터 아세톤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과학자를 소개받습니다. 그가 바로 하임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입니다. 그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시온주의 또는 시오니즘 Zionism 이란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인 민족주의 운동입니다.) 그가 1910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설탕으로 인조고무를 만드는 실험을 하던 중, 우연히 아세톤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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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 바이츠만

그는 영국정부의 요청으로 옥수수, 밀, 감자 등 곡물에서 추출한 녹말에서 대량의 아세톤을 생산해 냄으로써 1차 세계 대전을 영국군이 승리하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합니다. 1917년 영국 수상이된 전군수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하임 바이츠만 박사의 공로에 보답하고자 그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이츠만 박사는 자신의 평생소원인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영국 수상도 이 요청은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미 1915년에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의 독립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분쟁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발포어 선언(Arthur James Balfour. 당시 외상. 후에 총리가 됨)

고민 하던 중 영국 수상은 그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어 결국 “발포어 선언”을 하게 됩니다. 발포어 선언은 외교적 성명서가 아니고 영국의 외상인 발포어가 전시 자금을 많이 댄 로스차일드(은행가. 시오니스트 회장)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1917년 11월 2일
존경하는 로스차일드경
나는 열성적인 유대 시오니스트에게 호의적인 선언문이 제출되어 내각의 승인을 얻은 것을 국왕 폐하의 정부를 대신하여 귀하에게 전달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유대인을 위한 국가가 팔레스티나에 건설되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 촉진하는데 최상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어떤 다른 국가도 유대인들에 의해 향유되는 정치적 상태와 권리 혹은 팔레스티나에 존재하는 비 유대공동체의 종교적 시민적 권리를 손상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나는 귀하가 이 선언의 내용을 시오니스트 연맹에 알려주신다면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아서 제임스 발포어 Arthur James Balfour.

이것이 바로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이고 중동의 화약고가 된 원인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국가가 건설되고 초대 대통령으로 아세톤을 개발한 하임 바이츠만이 취임하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우수한 두뇌와 돈으로 세운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돈장사하는 것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애초 영국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이스라엘 독립 국가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반대하자 팔레스타인 땅을 양보하고 만 것입니다. 당시 영국인들이 조금만 더 사려 깊었다면 지금과 같은 중동 분쟁의 씨는 자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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