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첫 사랑, 짝사랑

5.1.2011.

구불구불 돌담 밑으로 졸졸 흐르는 개울을 따라 가래떡같이 얍삽한 논두렁의 물꼬를 건너다보면 손바닥만 한 은빛 백사장이 나를 기다린다. 어떤 날은 목까지 차오를 듯 가득하게, 사리 때는 드넓은 개펄로 바닷속을 들어 내놓는다. 백사장에 드러누워 갈매기를 보노라면 어느덧 붉은 황혼은 얼굴에 물들고 땅거미 등에 지고 동네 어귀에 이르면 올망졸망 사이좋게 머리 맞대고 누워 있는 초가지붕 사이로 저녁 짓는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천 년의 세월을 안은 이끼 낀 돌담 구멍 사이에 ‘고추’를 넣고 쉬를 할 때는 아! 나의 인생이 이렇게 시원한가 하고 혼자만 느끼기 아까워 할머니에게 얘기하면, 할머니는 구렁이가 고추 따 먹는다고 깜짝 놀라곤 하셨다.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저녁을 먹고 멍석에 누워 별을 세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언제나 방안이었다.

산과 들로 바다로 쏘다니다 보면 타이어 표 검정 고무신은 바닥이 성할 날이 없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나를 붙잡고, 어머니는 내 발바닥을 천장으로 향하게 하고 나무 등걸에 상처 난 주위를 된장으로 동그랗게 만들어 그 안에 끓인 간장을 부었다. 나는 자지러졌고 내 유소년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덥고 후덥지근한 어느 여름날 여느 때와 같이 마당에서 고무줄넘기 하는 여자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빨간 주름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동네에서 아무도 입지 못한 주름치마를 입고 피부가 유난히 하얀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게 원하지 않은 나의 첫사랑은 어느 여름날 반 바지의 구멍 난 주머니 사이로 들어왔다. 그날 이후부터 AD와 BC가 구분되듯 나의 소년 시절은 달라졌다. 초등학교 갈 때 올 때 생각 없이 지나던 그녀 집 앞을 천천히 걸으며 집안을 살피고 그때마다 철없는 강아지는 짖어 댔다.

그녀는 공부 잘 못하고 맹 했다. 그래도 나는 혼자서 결혼도 해 보고 방안에 드러누워 천장 벽지의 무늬에다 그녀와 나를 ‘사진각구’처럼 넣어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내가 단둘이만 우리 집 방안에 잠시 있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어찌할까 봐 겁이 났고 한편으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녀는 나의 얼굴을 만지더니 그냥 방을 나가 버렸다. 그때의 그 기분은 오래도록 나의 가슴에 성형할 수 없는 흉터로 남았다. 그 이후론 단둘이 한 번도 함께 있어 보지 못했다.

그렇게 답답하게 시간은 흐르고 그해 늦가을 겨울의 길목에서 어머니는 나의 구멍 난 반 바지 주머니를 꿰매셨고 나는 고향을 떠났다. 나의 사랑은 그렇게 떠나갔고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그녀는 내 눈에 잠깐의 영광을 베풀고 내 영혼을 처형해 버렸다.

Beethoven Sonata for Piano and Violin No5. 2nd movement. “Spring”
Violin: David Oistrakh (러시아. 1908 – 1974)
Piano: Lev Nikoláyevich Oborin (러시아. 1907 –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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