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진실 앞에는 수식어가 필요 없다

7.1.2018

글을 시작하기 전에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변부터 드리고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댓글을 달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 블로그에 댓글을 달도록 하지 않는 이유는 일일이 댓글을 확인하고 답글을 쓰려면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물론 댓글을 달고 논쟁하면 트래픽 수는 늘겠지만, 저는 게을러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제 글은 저의 클라이언트를 위한  글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개인 지식과 생각이 다르므로 논쟁은 있을 수 있으나 꼭 ‘똘것’들이 있습니다. 저의 전문 용어라 쉽게 설명하자면 트럼프나 김정은처럼 보편적 정서를 벗어난 사람. 생물학적으로는 종이 다른,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 인터넷 용어로는 악플러, 좋은 말로 돌연변이. 힘들게 글을 쓰고 마음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기에 댓글 쓰는 것을 만들지 않은 이유도 있습니다.

작가 박준은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쁜 댓글은 손가락에서 태어나 눈에서 죽는다. 이런 글은 흉기가 되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좋은 댓글은 머리에서 태어나 마음에서 죽는다. 좋은 글은 죽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감동을 주고 세상을 따듯하게 한다.’

우리는 신용 상실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신용을 “거래한 재화의 대가를 향후 치를 수 있음을 보이는 능력. 외상값, 빚, 급부 따위를 감당할 수 있는 지급 능력으로 소유 재산의 화폐적 기능”이라고 복잡하게 설명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은 당연히 돈입니다. 현재 돈이 많고 능력이 있으면 외상도 필요 없고 빚을 낼 필요도 없으므로 신용이 향후 치룰 수 있음을 보이는 능력이라고 했으니  믿는다는 말은 미래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믿었다고 과거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일부 착한 여성을 빼고, 믿었었는데 저 인간이 나를 등쳐 먹었네.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기본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즉 관계입니다. 돈이 기본이 되는 사회, 자본주의이므로 돈거래가 수반됩니다. 빌려주는 A는 빌리는 B의 신용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개입 자가 있습니다. 빌려주는 A의 의심을 제거해 주는 대가로 돈을 버는 해결사, 신용 조사, 신용 카드 회사입니다. 인간을 철저히 자신들이 정한 점수로 환산합니다. 크레딧 스코어. 신용 상실 시대입니다. 인격이나 양심 따위는 철저히 배제합니다. 점수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가받는 객체의 의견은 배제된 체 평가하는 주체의 기준에 따라 매김 당합니다. 호모 사피엔스,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신용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신용이 높다, 낮다 숫자로 형이하학적 개념으로 바꿔버립니다.

신용(信用 믿을 신, 쓸 용)은 ‘믿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평가는 하는 것이 신용입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진실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진실은 과거나 미래나 변하지 않지만, 신용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내포하기에 믿음이라는 주관적 암시를 강요합니다. 종교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신앙심(信仰 믿을 신 우러를 앙, Faith)이 깊다는 것은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깊다는 뜻입니다. 신이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에 있다고 믿자는 강요 된 학습일 뿐입니다. 진실은 그 자체가 당연히 진실이기에 믿음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은, 진실인 것은, 믿는다는 자기 암시가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믿는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불변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신용 상실 시대라 사랑도 그냥 사랑해 하면 믿지 않습니다. 진짜로, 정말로 사랑해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빠 믿지?’ 당연히 거짓이라는 것을 여성은 잘 압니다.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빠 손만 잡을 거지?’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진실이기에 수식어가 필요치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 그대로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기를 사랑한다.’

정치에서도 위정자들의 과거 통치 행위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에 신용이 매우 중요 합니다. 가짜들이 진실인 양 국민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란 백성이 주인인 국가 제도입니다. 백성이 주인이란,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합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라는 단어 안에 자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유가 없으면 국민이 권력(투표권, 촛불 집회처럼 표현, 집회의 자유 등)을 행사할 수 없기에 민주주의에서는 자유가 당연하며 기본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의 수구 세력과 수구 언론인 조중동은 ‘민주주의’란 진실 앞에 수식어를 붙여 줄기차게 ‘자유민주주의’를 외칠까요? (한국은 영국이나 미국에서 말하는 보수가 없기에 권력을 쟁취하여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려는 집단들이기에 수구 세력으로 표현함)

답은 간단합니다. 이명박 박근혜 시절 뉴라이트라고 하는 수구의 한 축이 만든 교과서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교과서 136~149쪽을 보면 건국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성립’이라는 설명을 이렇게 했습니다. “개화기와 식민지시기에 걸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 온 근대화 세력과 해방 이후 미국을 따라 들어온 자유민주주의 국제세력의 결합으로 대한민국이 성립하였다.” 여기서 식민지 근대화세력은 친일파를 말하고 자유민주주의 국제세력은 이승만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세력은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해 줄기차게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이런 교과서를 만들어 놓으니 어느 학교도 채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군화 발(Iron Heel)로 자유를 짓밟은 자들이 고귀한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갖다 대고 유신헌법으로 민주주의를 말살한 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앞에 어떠한 수식어를 붙이는 자들은 모두가 독재의 DNA가 있는 수구 세력입니다. 유신헌법을 만들어 놓고 ‘한국적민주주의’라고 했습니다. 북한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선을 ‘한국’으로 바꾸고 유신헌법도 일본 ‘메이지유신’을 그대로 복제 했습니다. 박정희의 경제 계발 5개년 계획도 1928년부터 소련의 스탈린이 시작한 ‘국민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똑같이 카피했습니다.

민주주의 앞에 붙이는 사회, 인민, 자유, 평등 등 그 어떠한 것도 용납돼서는 안됩니다. 불순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자유를 추구하고 진보는 평등을 추구한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지만, 이것은 권력을 쟁취하여 사익을 추구하려는 세력의 프로파간다로 일부 국민들이 속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이고 진보는 사회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친북 울타리에 가두려는 작태입니다. ‘민중’이라는 말을 북한에서 사용하니 너희들은 ‘친북 좌파다’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입니다. 미련한 게 북한에서는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민’이라고 하지요. 대한민국 경찰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경찰의 캐치 프레이스가 ‘민중의 지팡이’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사회민주주의로 가려는  방편으로 교과서에서 ‘자유’를 뺐다는 논리입니다.

민주주의 앞에 꼭 무슨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면 추천할 단어가 있습니다. ‘게으른 민주주의’가 현재의 수구 세력에게 딱 맞는 표현입니다. 정말 두 번 쳐다보기도 싫은 최순실이 수렴청정하고 출근도 안 해서 게으른 대통령이라고 탄핵당했으니 ‘게으른 민주주의’  또는 ‘나태한 민주주의’ ‘무능한 민주주의’가 딱 어울립니다. 이제 이들은 차마 자신들을 보수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자유민주세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조상제한서’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말의 뜻을 아시는 분은 역사의식이 있는 지식인입니다.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은 우리 생애에 겪은 역사입니다. 제 글을 읽어 오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꽃인 대한민국의 5대 은행의 이름입니다. 조흥 은행, 상업 은행, 제일 은행, 한일 은행, 서울 은행입니다. 단 한 곳도 남아 있는 곳이 없습니다. 수구 세력이 외환 위기로 국가를 부도낸 후 모두 사라졌습니다. 관치 경제로 은행장을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자신들의 마음대로 임명하고 재벌 기업에 편법 대출하도록 압력 넣고 댓 가로 정치자금을 차떼기로 받아먹었습니다.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공적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부도 직전의 은행에 자금을 대주었습니다. 수구들이 받아먹은 차떼기 자금은 국민의 세금이었던 것입니다. 국민을 등쳐 먹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외치고 있으니 도대체 이 집단들은 양심이라는 것이 1%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 앞에는 어떠한 구호나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진실은 사람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진실입니다. 기름을 가라앉히려고 물을 아무리 퍼부어도 기름은 떠오릅니다. 물속 기름과 같은 것이 진실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역전(驛前)앞’ 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겹말 일 뿐입니다. 이러한 이중 표현을 단순히 지적 허영심의 발로라고 만 할 수 없는 것이 친박 세력의 뻔뻔함이나 태극기 세력의 확증편향을 보면 고민 없이 사는 것도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무소의 뿔처럼, 그 신념이 멋있잖아요? 젊은 시절 그러한 신념으로 살았다면 지금처럼 길거리에서 유랑하지 않을 텐데….

제가 이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아래 링크에 가서 보십시오. 좌파는 공부하다 만 얼치기들이라는 논리입니다. 극히 소수인 일부 진보 학자의 오류를 지적하며 마치 진보 진영 모두가 그런 것처럼 호도하고 있습니다. 조중동의 논설위원 수준이 이렇습니다. 서 푼어치 알량한 지식으로 먹고사는 조중동 논설위원들께 묻습니다.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를 외칠 때 그때도 그대들의 신념이 ‘자유민주주의’였는가? 시류에 따라 유행처럼 변하는 당신들의 비양심적이고 알량하고 진실성 없는 비뚤어진 지식을 누가 받아 들이겠는가? 동아일보 논설위원 글 보기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역사를 따라 흐르는 강”이라고 했습니다. 온갖 교언(巧言)으로 도도히 흐르는 4대강을 막은 결과 썩고 말았습니다. 흐르는 강을 막아 샛길로 물길을 돌리려는 이념 논쟁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미 국민의 수준은 조중동의 수준을 넘었다는 것을 그들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자신들이 쓰면 여론이 된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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