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광해가 근혜에게

11.7.2014.

나는 조선(朝鮮)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이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면서 역사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오늘이란 것을 새삼 느낀다. 역사의 두려움을 안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지도자들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도 역사의 희생양으로 지난 400년을 억울하게 지내왔다.

내가 통치했던 시기의 역사 기록은 나를 쫓아낸 인조(仁祖)가 기록하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고 하지 않고 깎아내려 광해군 일기(光海君 日記)라고 이름을 붙였다. 역사의 기본인 사실과 객관성을 잃은 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자유당 정부를 무능과 부패 정권으로 몰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3김 씨를 부패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감금시키고 사형 선고까지 한 것을 비교해 보면 이해할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특히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과 같은 관청인 승정원(承政院)에서 기록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그 가치는 조선 시대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승정원 일기(承政院 日記)가 내가 통치했던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쿠데타로 나를 쫓아낸 인조(1623년) 때부터 순종(1910년) 때까지 기록만 남아 인조가 나에 대해 나쁜 점만 기록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역사를 잘못 배운 나의 후손인 대한민국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나 또한 깊이 반성한다. 정권이 바뀌고 나라의 이름은 바뀌어도 역사는 영원히 기록되어 후손의 비판을 받는다는 역사의 두려움을 알았더라면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았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궁궐에서 나이 든 환관과 상궁들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다.

그러나 15년을 왕으로 재위했는데 왕을 폐위하여 묘호(廟號)도 없이 김 군, 이 군과 같이 광해군(光海君)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조선의 역사에서 군(君) 출신은 나와 연산군인데 연산군은 진짜 나쁜 짓을 많이 했고 나는 좀 다르다. 국가 전복을 기도한 군사반란으로,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하여 감옥까지 간 전두환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데 나만 왜 지금까지 군(君)이냐?

내가 본관이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니 이 군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역사관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지금 50대 이상인 사람들은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대한민국의 뿌리인 조선 시대 역사를 “이씨 조선”이라고 배웠다.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들도 자신이 배워왔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다. 왜놈들이 조선의 역사를 전주 이씨 가문이 통치한 하나의 씨족사회로 깎아내려 쓴 역사를 아무런 비판적 의식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비하(卑下)하는 “자학사관”(自虐 史觀)이다. 특히 해방 후 서울대에 이런 친일파 자학사관 먹물이 많아 조선의 역사는 물론 근 현대사를 일본인 학자들이 쓴 것을 참고하여 한국사를 기술했다. 자신들이 일본놈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니 그 이상의 교양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지금도 뉴라이트계열 학자라는 인간들이 일본이 우리에게 산업 국가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일제 강점이 단지 나쁘지만 않았다는 황당한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주가 되어 역사 교과서를 쓰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지금까지도 “이씨 조선”이란 말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쓰는 것이다. 일본 속담에 “거짓도 자꾸 말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실천한 인간들이 바로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이다. 일본을 55년 동안 통치해온 자민당과 극우 세력들의 구호인 “잃어버린 10년”을 이명박이 슬로건으로 빌려 정권을 잡았다. 그것뿐이 아니고 언론을 장악해야 집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자민당에서 배워 임기 중 종합편성채널을 허가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일본으로 달려가 일왕에게 머리 숙여 배알하고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자민당의 아소 다로 총리를 만나 “일본의 과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본과 합심하여 북한과 싸우겠다”고 했다. 이명박이야 자신의 고향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배웠다는 학자들까지도 친일 사관에 젖어있는 것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후대 학생들을 가르치니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더 한심한 것은 지금도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행사를 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아무 생각 없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한다. 도대체 순국선열이 누구인가? 순국선열(殉國先烈)이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하다 운명한 애국지사 아닌가? 이런 순국선열들이 국적이 없었다면 이해를 하겠는가? 아쉽게도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이 없었다. 이들은 왜놈들이 통치하는 국가에 호적을 둘 수 없다며 무국적자로 남았다.

선열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줘야 한다고 하면 대한민국 법무부는 이미 사망한 사람은 호적을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후손이 없다. 이봉창, 윤봉길 선생의 경우 후손이 없다. 봉오동전투로 유명한 홍범도 장군의 경우는 후손이 러시아에 있다. 누가 국적을 신청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청산되지 않은 법조계다. 법조문은 지금도 일본놈들의 법조문을 그대로 쓰고 있다.

다행히 2009년에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의 발길에 채지 않도록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띄우라”고 유언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독립유공자들이 국적을 받게 되었다. 불과 5년 전이다. 독립유공자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질 수 있는 데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1936년 중국 여순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호적 없이 지냈다. 그에게는 아들 신수범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국적이 없으니 호적에 자식으로 올리지도 못했다. 성년이 되어 결혼하게 되는데 아내에게 자신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자주 얘기했다. 그런데 1967년에 결혼하여 현재 71세인 아내 이덕남 여사가 70년대 초 첫 아이를 출생 신고하다가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훌륭하고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자랑하던 사람이 사생아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 여사는 남편과 함께 국적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300여 명이 대한민국 국적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 그로부터 30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언론과 국회를 오가며 노력한 결과 국적을 받게 된 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한 망명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작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수 십 년 동안 대한민국 국적이 없었다니 말이 되는가? 이것도 부족하여 보수라는 인간들은 독립운동가를 왜놈들이 말하는 것처럼 테러리스트라고 한다. 부정부패와 독재로 쫓겨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떠받들고 있다. 내가 역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똑같은 역사를 배웠는데 왜 이렇게 달라질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하나같이 못살고 친일파 후손들은 학계, 정계, 법조계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을 보고 나보다 400년 후손인 한국인들이 너무 답답하여 나의 이야기를 하려다 한마디 했다. 그리고 존칭 안 쓴다고 기분 나빠 하지 마라. 새까만 후손들에게 당연한 얘기고 나는 자격없는 사람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다. 글이 좀 거칠어도 이해해라. 이것이 내 스타일이다. 나는 왕이 된 남자, 광해니까.

잠시 한국인의 역사관을 얘기하다 보니 내가 열을 좀 받았다. 다시 400년 전으로 돌아가 내 얘기를 하자. 한국의 역사책은 왜 그렇게 어렵고 무질서하게 썼는지 모르겠다. 학창시절에 연도 외우다 시험 끝나면 다 잊어먹고 지금 생각하면 그놈의 묘한 무슨 기묘사화니 갑자사화니 을사사화니 하고 무슨 놈의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니 하는 것들만 가물가물하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조선왕 이름 앞 대가리만 따서 외운 것 하나 남아있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역사 지식이 없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다.

우리 가문이 복잡하지만, 오늘의 주제가 가문 설명이 아니기에 알기 쉽게 간단히 설명한다. 우리 가문이 원래 종자 퍼트리기를 좋아해 후궁을 많이 두다 보니 복잡하다. 나의 아버지는 선조(宣祖)다. 조선 최초의 서자(庶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직계가 아닌 방계 혈통의 임금이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성리학(性理學)인 주자학(朱子學)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왕의 임기가 없다 보니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었음을 본다. 정통성 없이 왕위를 차지한 왕일수록 왕권 강화에 힘을 쓰다 결국 끝이 좋지 않음을 많이 볼 수 있다. 신하들 또한 정통성 없는 왕들을 끝없이 흔들어 자신들의 안위인 신권(臣權)을 위해 국가를 말아먹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7대 임금 세조(世祖)다. 왜 갑자기 아버지인 14대 왕을 설명하다 7대조로 올라가느냐고 의아해하지 마라. 역사는 흐름이므로 쉽게 이해하려면 뼈대의 지식을 갖추고 거기에 살을 붙여 이해해야 쉽다. 학교 선생들은 역사를 외우는 과목으로 가르치니 교문만 나가면 잊어버린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바둑처럼 이해해야 한다.

조선의 왕은 왕권을 하늘이 부여한다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과 비슷한 관념이 있었는데 세조는 무력으로 권력을 빼앗았으니 국민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세조는 쿠데타(反正)로 정권을 잡자마자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반정(反正) 공신인 신숙주, 서거정, 이극돈 등을 등용하는데 이들이 바로 전문 정치꾼들로 조선 시대 파벌 붕당 정치를 가져온 훈구파(勳舊派)의 시작이다. 이들은 막대한 토지를 세조로부터 불하받았다. 흔히들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망했다고 하는데 그 당파가 어떻게 생겨났고 흐름이 어땠는지 설명하기 위해 7대조인 세조를 설명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로 군인 정치(勳舊派)가 시작된 것과 같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9대 왕 성종(成宗) 때가 되면 이들에 맞서 신진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훈구파와 쌍벽을 이루는 사림파(士林派)이다. 낙향하여 공자 왈 맹자 왈 만 읊고 있던 주로 영남지역 학자들이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과거(科擧)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지성들이었다.

김영삼이 정권을 잡으면서 훈구파인 병영 정치가 끝나고 문민정치인 사림파(士林派)가 시작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김영삼은 순수한 문민 세력인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만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고 훈구파인 군인 출신과 합쳐 정권을 잡았다. 그래도 문민정부(文民政府)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림파가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은 나의 아버지인 14대 선조 때부터다. 아버지 선조는 사림파를 우대했는데 더 나아가 사림파 내에서 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붕당이 되었는데 동서분당(東西 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동인은 기존의 훈구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로 주로 영남학파와 관련이 있고 동인은 여기서 또 갈라져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사색당파(四色 黨派)를 형성하게 된다.

서인(西人)은 강경파인 동인(東人)과 달리 비교적 온건파로 지역적으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의 기호 지역 명문가 출신들로 중심이 되어 조선 후기 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기반을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서인이 주도한 쿠데타로 권력을 잃고 만다. 붕당정치는 23대 왕 순조 때 안동 김씨가 나타나면서 붕당은 사라지고 세도 정치가 나타나면서 조선은 부패의 끝으로 치닫기 시작하고 결국 멸망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조선 시대 대표적 당파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있는데 훈구파는 당파가 분열되지 않고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되고 북인은 대북 파와 소북 파로 분리되는데 나는 소수파인 대북 파와 손을 잡고 집권했다. 내가 골치 아픈 당파를 아는체하고 설명하는 이유는 아버지나 나나 당파 등쌀에 임진왜란을 만났고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 자로 찍혀 폐위됐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버지처럼 서자(庶子)다. 나의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 金氏)다. 아버지 선조의 후궁이다. 형인 임해군과 나를 낳고 2년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를 아주 미워했다.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하여 왕의 자격이 없음을 아버지는 일찍이 아셨고 나는 영민하지만, 아버지처럼 서자라 미워했다.

아버지는 의인왕후 박 씨를 통하여 적통의 아들을 가져 자신과 같은 서자 출신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자식을 갖지 못했다. 나는 17세까지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자신이 급하니까 할 수 없이 나를 세자로 책봉하여 임무를 주었다.

조선 왕조에서 세자 책봉식은 왕의 취임식 못지 않게 화려했는데, 전시인 비 오는 어느 날 아빠가 나를 불렀다. “야! 광해야, 너 세자 해!” 이렇게 해서 나는 세자가 되었다. 하다못해 초등학교 반장도 임명장이 있는데 차기 왕이 될지도 모르는 세자를 책봉식도 없이 구멍가게 가서 담배 사오라고 심부름시키듯 했다. 나는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여 왜군과 싸워 적잖은 성과를 올렸다. 내가 실전의 경험이 있어 나중에 왕이 되어 명나라와 청나라의 군사력을 간파하고 뼛속까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젖어있던 간신들을 물리치고 중립 외교로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지만, 나는 도성을 지켰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에 정통성이 없어 승승장구하는 이순신과 나를 끊임 없이 견제하였다. 그리고 툭하면 임금 못 해먹겠다고 땡깡을 부렸다. 선위(禪位. 왕이 살아 있을 때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정치적 레토릭을 즐겼다.) 무려 21회. 땡깡의 원조가 아버지다. 노무현이 아니다. 노무현이 실록을 읽고 차용한 것이다.

아버지를 욕하는 것 같아 그동안 참고 있었는데 기록은 기억을 남기는 일이기에 사실이니 솔직하게 말한다. 전쟁으로 창피하게 아버지가 의주로 피난 가는 길을 형인 임해군과 내가 아버지를 호위했다. 개성에 도착하니 개성 사람들은 나라를 망하게 한 놈이라고 돌을 던졌다. 개성은 고려의 유신(儒臣)으로 만들어진 고장이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때까지도 고려를 그리워하며 조선의 양반이 되기보다 고려의 상놈이 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나라는 왜놈들에게 짓밟히고 부녀자들은 강간당하고 식량과 가축은 모두 약탈당해 국민이 거지가 되게 만든 아버지도 왕이라고 역사에 기록했다. 아일랜드는 800년 가까이 잉글랜드에 지배당했다. 19세기 중반에는 감자 전염병이 번져서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소고기와 양고기가 흘러넘쳤지만, 모조리 잉글랜드 지주들이 수탈해갔다. 800만 인구 가운데 150만 명이 굶어 죽고 100만 명이 신대륙인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 한 영국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 국민이 거지인 나라는 아일랜드밖에 없다.” 조선과 무엇이 다른가?

어디 이것뿐인가? 나의 왕권을 박탈하고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는 불과 23년 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조선을 통째로 후금인 청나라의 홍타이지에게 바쳤다. 이런 사람도 왕이라고 기록했다. 나는 전쟁으로 가난해진 국가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각고의 노력을 했다. 세종 때 국가 토지가 170만 결이었던 것이 임진왜란 후 60만 결로 줄었다. 마치 김영삼이 국가 부도내고 김대중이 국가를 물려받을 때와 같다. 조선 500년 동안 가장 어려운 시기에 왕권을 물려받았다.

전쟁으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아버지가 시작하여 완성하지 못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내가 지시하여 완성하였다.

나는 소수파인 대북 파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아 개혁군주로 노력했으나 나의 큰 실수는 왕권 강화를 위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한 것이다. 폐모살제(廢母殺弟). 변명이 아니라 영창대군을 죽인 이유도 아버지에게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왕권을 끝까지 물려주지 않으려고 아버지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자손 없이 사망하자 적자 자손을 가지려고 19세인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를 왕비로 간택했다. 아버지 나이 51세. 임진왜란이 끝나자 아버지는 나에게 명나라에서 세자책봉 허락이 없었으니 너는 세자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피를 토했다.

나는 세자시절 16년 동안 단 한 번도 책잡힐 일이 없었다. 명나라에서도 세자책봉을 끝까지 반대했고 심지어 왕의 책봉에도 반대했지만, 나는 세자가 됐고 왕이 되었다. 명나라가 나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이유는 우연한 일치처럼 명나라도 당시 조선과 똑같이 서자가 세자가 되는 과정이었기에 전례를 만들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 때의 당파 정치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조선대대로 내려오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지양(止揚)하고 중립 외교를 채택하자 많은 관료가 반발했다.

명나라 조정 내에는 내가 청나라와 결탁을 의심하며 조선 감호론(朝鮮監護論)이 주창된다. 청나라(후금)를 치기 위해 조선군을 파병해 주지 않으면, 명나라가 조선에 감호사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조선군의 지휘권을 간섭하며 대후금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파병의 요구도, 명나라의 조선 감호론도 막아 내기 위해 명에게 사신을 보내는 한편 명나라 사신이 오는 길목에 청과의 심하 전투에서 명나라를 지원하다 숨진 장수 김응하의 사당을 세워 대청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등 외교적인 계책으로 명나라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역사는 지난 과거사가 아니다. 지금 똑같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비롯하여 이라크 전쟁까지 전쟁만 나면 한국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을 보라. “명.U.S.A”

베트남의 경제 발전이 눈부시다. 민주정권이 정권을 다시 잡는 것은 시간문제다. 인간은 배부르면 자유를 원하니까. 그렇게 되면 한국이 일본에 대한 전쟁 보상으로 대일 청구권을 행사한 것 이상으로 천문학적인 전쟁 보상을 베트남은 한국에 요구할 것이다. 이 보상을 한국이 미국에 전가할 수 있을까?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내가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또다시 사대주의로 무조건 친명 배금 정책(親明 排金政策)을 폈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어 조선을 청나라에 바치고 말았다. (삼전도 굴욕)

400년이 지난 현재,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렇게 나를 재평가한다.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중립 외교 정책을 써서 명의 군사요청을 들어주면서도 후금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실리 외교인 중립 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 군사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글의 주제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미국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전시작전권을 구걸하다시피 해서 미국에 주었다. 군대는 전시에 국민과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을 국군 통수권자라고 하는 것이다. 전시에 필요한 작전권을 미국에 준다는 것은 국군 통수권을 미국에 줬다는 말이므로 대한민국 대통령은 쿠데타 방지를 위해 자신이 맘에든 사람만 쓰는 인사권만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현직 대통령은 연평도 포격 때처럼 국지전이 발생하면, 선조치 후 보고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국지전이 일어나도 지휘 통제할 필요도 없고 전쟁이 나면 데프콘 3가 발령되어 자동으로 작전통제권이 미국 군인인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간다. 미국이 한국 군대를 통치하니 도대체 무슨 대통령이라고 해야 할까?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떨고 있을 대한민국 대통령을 상상해보라. 아무리 군대를 모르는 대통령이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지도자의 덕목은 인재 등용에 있다. 특히 국가의 안보를 담당하는 국방부 장관이나 청와대 안보실장의 선택은 아주 중요하다. 전 정권에서 전시작전권을 다시 가져오는 환수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을 현 정권에서 다시 등용하여 전혀 반대의 주장을 펼쳐 국민을 우롱하는 인사는 한심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대한민국 똥별들에 추천한다. 한국 정치인들은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면 찾아가는 곳이 동작동 현충원이다. 선열들에게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현충원을 갈 것이 아니라 현충원 가는 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死六臣) 묘지에 가서 참배해야 한다. 이곳에 가면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이 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다. 둘이 아닌 하나의 진리를 상징한다.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불이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사육신 묘지가 절(寺)이 아닌데 왜 불이문(不二門)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이문 (2)                                                    (사육신 묘지로 들어가는 불이문)

나의 선대 왕 7대 세조는 단종의 복위를 추진한 사육신을 잡아다 죽였다. 성삼문은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로 고문을 당해도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고 불렀다. 육군 참모총장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시고 이명박 정부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나리를 지내시고 박근혜 정부에서 초대 국가안보 실장을 지내신 꼿꼿 장수 김장수.

육군 대장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 박근혜 정부에서 현 국가안보 실장인 김관진, 선조의 묏자리가 좋아 관운이 있는지 모르나 문인 출신도 아닌 무관이, 충신불사이군은 바라지도 않지만, 전혀 이념이 다른 정권에서 자신이 했던 정책을 뒤집는 뻔뻔함이란 하루만 지나도 상해버리는 숙주나물처럼 변절자 신숙주(申叔舟)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재가 없는가? 대한민국 똥별들, 이명박을 요리하더니 유례가 없는 독신 여성 통수권자를 가지고 노는구나. 얼마나 겁을 줬으면 전시 작전권 환수를 무기한 연기 했을까? 이제 대한민국은 똥별들의 세상이 되었다. 전시 작전권 환수를 위해 전력증강이 필요하다며 수시로 천문학적인 무기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한다고 언론 플레이할 것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 전시작전권을 환수했다면, 안보를 위해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래저래 무기중개상의 전성시대가 왔고 똥별들은 떡고물에 꽃놀이패를 쥐었다. 어린아이들 무상급식에는 좌파의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하고 4대강에 자원 외교라고 100조 원이 넘는 국민 세금을 날려버린 집단들에 세뇌되어 체면 걸린 대한민국 국민이 정말 불쌍하다.

역사의 두려움을 알고 지혜로운 국방부 장관을 두는 것은 통수권자의 큰 복이다. 복은 담을 수 있는 그릇 크기만큼만 온다. 복은 넘치는 순간 화(禍)로 변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500년을 통틀어도 역사 이래 자국 군대 통수권을 타국에 준 역사가 없다. 심지어 군신 관계였던 청나라 때도 군 통수권은 조선 왕이 갖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나보다 30년 선배인 이순신 장군과 시대를 한탄하며 한잔 했다. 임진왜란 때 그는 바다에서, 나는 이름과 달리(光海君) 육지에서 왜군과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워놓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지나친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김대중은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김정일에게 남한을 갖다 바치려 한다고 할까 봐 작전권 환수는 말도 못 꺼냈지만, 노무현은 결정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역사의 기록은 어떻게 할까?
지금까지 얘기한 나의 과거 역사를 보면 400년 전의 얘기가 이렇게 생생한데 안 봐도 비디오다. 역사는 기억에 대한 기록이므로 오래될수록 선명해진다.

아버지는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외치고 딸은 외주국방(外注國防)을 외치는 나라,
대한민국은 지금 몇 시인가?

오빠한테 전화해, 한 수 가르쳐 줄게.  – 광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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