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자본주의, 함부로 쓰지 마라

5.16.2014.

넘쳐나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글 속에서 답답하여 한마디 합니다.

70억이 넘는 인구가 지구 상에 살아가는데 사건 사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고가 인재에 의함을 볼 수 있습니다. 천재라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인간이 자연환경을 파괴하여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사고 후 대처하는 방법이 선진국과 후진국이 확연히 다른 점을 봅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인사 사고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후진국은 인명을 경시하여 사고도 자주 나지만, 인명 구조에 낙후된 게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사고가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습니다. 2,700여 명이 산사태로 묻혔는데 구조 노력도 하지 않고 단 하루 만에 ‘집단무덤’으로 선언했습니다. 마치 신이 노해서 산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원시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원시 시대부터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외로움을 느끼기에 규정을 따라야 하는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고 집단 속에 자신을 기꺼이 동화시킵니다. 그래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외로움과 소외감을 정확히 이용하여 성공한 기업이 바로 Facebook이나 Twitter와 같은 SNS라고 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ing Service. 누리소통망)비즈니스 입니다.

집단을 이끌어 가려면 추장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대통령처럼 지도자인 리더가 필요했습니다. 리더는 법과 규정을 어긴 사람을 단죄하여 사고를 미리 방지할 의무가 있고 사고가 나면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하여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여론을 조성하는데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군사 독재 정부 이후로 인명을 경시하고 성장만이 최고 지선(至善)인 정책으로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것을 고치고 개선해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임무입니다.

난세(亂世)에 영웅 난다고 비상시에 진정한 숨은 실력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우리는 리더십(Leadership)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랜 군사정부 체제로 리더십이란 상명하복(上命下服)이란 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포용(Inclusion)과 소통(Communication이 아닌, Interactivity – 쌍방향 소통)입니다. 그래야 존경과 권위가 생겨 조직을 잘 이끌게 됩니다.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를 다녀옵니다. 그러나 제대 후 지금까지 존경할 만한 상관이 기억에 없는 것은 소통과 포용이 없는 상명하복의 리더였기에 그렇습니다. 리더십이란 한마디로 대화(對話)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대통령의 리더십이 숨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상명하복의 사고를 하는 리더가 이끌어 가는 사회는 앞서도 손해고 뒤처져도 손해니 중간만 가자는 눈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면 일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 정부에서는 일하는 것처럼 서 있되 모나지 않게 중간만 가는 입지중동(立地中動)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몸 사리고 여론 눈치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리더십이 없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과 안철수는 정치권을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국민 세금을 축내는 종업원 130여 명인 당도 추스르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국가를 책임지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당이 못하면 야당이라도 잘해야 하는데 대안 세력이 없다는 것이 지금 한국 국민이 암담해하는 것입니다.

언론이 얼마나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지 이번 사건으로 한국인이 느껴야 하는데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을 조문 국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2주일 정도 조문 기간으로 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대통령을 지키려고 한 달이 넘도록 조문 정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노란색만 보면 아토피 알러지가 아니라 간질이 발작하듯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억지로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북한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보수세력은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언론을 총동원하여 온갖 말들을 지어내지만, 결국 사람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한 달 동안 언론에서는 별의별 가정을 내세워 선주와 공무원들의 잘못만 공격하고 대통령의 잘못은 거론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른쪽의 실종자 숫자가 왼쪽의 사망자 숫자로 옮겨가는 것 외에는 사망자가 304명이라는 것은 변한 게 없습니다. 살아나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매번 강조하듯이 대한민국은 조중동이 있는 한 바뀌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국민의 반을 바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천안함 사건만 보아도 언론이 정권을 위하여 국민을 기만하지 않았다면, 이번 세월호 사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천안함 사건은 대한민국 군대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왜 장교는 전원 생존하고 46명이나 되는 사병은 구조하지 못했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언론들은 가능성 없는 에어포켓으로 희망 고문을 하더니 세월호 사고 때도 역시나 에어포켓 가능성으로 국민을 호도했습니다.

훈련 중 적으로부터 공격받아 자신의 부하를 46명이나 죽였는데 해군 참모총장이나 그 이하 책임자들을 과연 어디까지 책임을 물었는지 모릅니다. 한·미 해군 합동군사작전 중에 연안 깊숙이까지 들어와 한국의 군함을 폭파할 정도의 기술을 북한이 어떻게 보유하고 있었는지도 전혀 언론에서 규명하지 않고 북폭침이 아니라고 하면 무조건 빨갱이 사냥(Red-baiting)만 했습니다. 원인 규명은 전혀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똑같습니다. 천안함 침몰할 때 장교들이 함께 죽지 않고 자신들만 어떻게 살아났는지 철저하게 규명했다면 이번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며칠 전 서울의 지하철 사고에서 시민들의 행동으로 학습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자신도 부모를 잃어 봐서 그 슬픔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고가 보통 사람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자식을 낳아 키워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상대의 아픔을 함께하려면 자신의 아픈 경험을 굳이 끌어다 자신을 내세우면 안됩니다. 더구나 자신의 부모 죽음은 역사 기록에 아주 부끄럽게 기록될 게 뻔한데 비교하면 안 되는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회적 인격 형성이 시작되는 12세에 청와대에 들어가 18년 동안 청와대에서 지내다가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왔습니다. 조선의 역사에 세자가 책봉되면 나이 든 신하들이 시중을 들고 가르칩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 든 사람들과 지내기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70이 넘은 비서실장과 국정원장 등 주변에 나이 많은 사람들을 쓰면서도 명령과 지시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일반 국민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 최고 부자인 이건희 씨의 생활을 추측만 할 뿐 정서를 공감할 정도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에게 사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짐이 곧 국가인데(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사과란 있을 수 없고 아랫사람들의 잘못이므로 책임을 철저히 묻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을 누가 임명했는지 잊은 것이지요. 대통령 철학의 부재입니다.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책임을 지는 국정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통치자, 지배자(Ruler)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수 언론은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공공요금인 승선 요금을 인상하면 다른 물가를 자극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에 정부에서 요금을 묶어 놓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업주는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불법을 저질러 결국 사고를 냈는데 지극히 정치적인 사항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하니 적반하장(賊反荷杖)입니다.

한 수 더 떠 일부 꼴통들은 이번 사고를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정부에서 요금을 묶어 놓으니 수익을 내기 위해 승객과 화물을 과적하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안전은 공짜가 없으니 복지를 줄이고 이런 곳의 운임을 인상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래서 꼴통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바탕으로 한다는 이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의 봉급이 너무 적어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많다고 급여를 현실화한다고 단계적으로 인상했습니다. 지금은 공무원의 급여가 퇴직 후 연금까지 계산하면 재벌 대기업의 임금보다 높다고 합니다. 과연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국민이 느낄 만큼 없어졌습니까? 역시 지금도 검찰청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제일 많이 찍는 사람이 정치인과 공무원입니다.

서울시의 택시는 승차거부로 유명합니다. 택시의 기본요금이 너무 낮아 하루 사납금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기본요금 인상해 주었습니다. 과연 지금 승차거부 없고 친절합니까? 인간은 탐욕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탐욕을 규제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자본주의 기본을 모르기에 ‘규제개혁 철패’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바보상자 TV 앞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7시간 쇼를 했습니다. ‘규제는 우리가 쳐부숴야 할 원수요 암 덩어리이다’라고 한지 불과 며칠 만에 규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고가 났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이번 기회에 꼴통들에게 한 수 가르쳐 드립니다. 자본주의란 말 앞으로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자본(Capital)이란 말은 라틴어 Caput에서 나왔습니다. ‘머리’라는 뜻입니다. 유럽에서 금융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이탈리아 메디치가라고 지난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은행(Bank)이라는 말도 사람들이 부둣가에서 의자(Bench → Bank)에 앉아 돈놀이 한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설명해 드렸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돈을 준비했는데 그 돈을 ‘머릿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영국으로 건너가 자본금이라는 뜻의 Capital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목조 건물을 지을 때 기둥의 기초석(基礎石)을 주춧돌, 또는 머릿돌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두머리라는 말이므로 비행기 기장이나 배의 선장을 모자(Cap)와 같은 뜻의 캡틴(Captain)이라고 합니다.

19세기가 되자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Capital)을 대는 자본가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보다 큰 권한을 갖는 체제를 ‘자본주의'(Capitalism)라고 부르면서 자본주의란 말이 생긴 것입니다. 자본이 토지나 노동보다 중요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애덤 스미스가 한 말로 알고 있지만, 그가 쓴 ‘국부론’에는 자본주의란 말이 단 한 단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란색에 경끼하고 빨간색에 투우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란 말을 빨간색의 원조인 카를 마르크스가 만든 말이니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특히 세월호 사건은 어른들이 피어나는 꽃망울을 모질게 꺾어버린 안타까운 일이기에 알량한 이론으로 자본주의를 들먹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무식한 투우 황소는 정작 색깔 구분을 못한답니다. 그냥 깃발 같은 천이 팔랑거리니 들이 받는다는 겁니다. ‘민주공화당’의 마크도 황소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는지 모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은 국민들이 딱 두 가지만 알고 있으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다 해도 이번처럼 대규모 인사사고는 없습니다.

첫째, 지도자의 리더십입니다.
권위십이 아닙니다. 지난 대통령의 리더십을 간단히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박근혜 대통령은 리더십을 지배와 통치로 이해한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권위십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남이 만들어주는 명예이므로(대통령직) 내려놓을 때 반대로 권위가 올라갑니다.

권위주의는 특정한 지위나 인물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감정적이고 자기몰입 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권위주의는 그 지위나 인물에 대한 맹신을 가져와서 반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독재자가 나옵니다. 쉽게 얘기하면 내가 권위가 있고 너는 없으니 내가 옳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기에 사고가 나면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임명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높일 때 권위가 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은 권위주의가 됩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군림하지 않으면 권위는 스스로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사고는 하나뿐인 생명,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죽인 정부를 보면서 권위십이 아닌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다음은 보스적 리더십입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시대적 산물입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군사독재 시절에 살아남으려면 한여름 뙤약볕의 아스팔트에 드러눕고 닭장 차 앞에 드러눕는 ‘도꼬다이’ 의리로 뭉쳐진 동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그들도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명박처럼 공사판에서 조인트 까고 밀어붙이는 것은 리더십이 아니고 노가다십이기에 글 쓰는 ‘잉끼’가 아까워 생략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리더십인 수평적 리더십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그는 관료주의와 수직적 권위주의를 과감히 버렸습니다. 보수들은 대통령의 권위를 잃었다고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위주의를 버림으로써 권위를 얻었습니다. 결론은 올바른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국민이 선택해야 내 자식을 제대로 키울 수 있습니다.

둘째, 공무원의 법적인 신분보장을 없애는 것입니다. 기업처럼 능력이 부족하면 과감히 퇴출하는 무한 경쟁의 체제를 공무원 사회에 도입하면 관피아도 막을 수 있고 철밥통도 과감히 없앨 수 있습니다. 국가 공무원도 구조조정을 수시로 할 수 있어 세금도 절약하고 효율적인 정부 운영이 가능합니다. 받아쓰기 잘하는 장관도 없어질 것입니다. 세상일은 알 수 없다고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한 실력을 언제 써먹을까 했는데 박근혜 정부 장관들이 써먹을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공무원의 신분을 법률로 규정하여 보장하는 이유는 신분상의 안정감을 통하여 사기를 높이고, 이를 통해 국민에 대한 봉사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분보장의 목적이 국민에 대한 봉사를 잘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지 공무원 자신들에게 일생에 걸쳐 이익을 주기 위한 제도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철밥통이 말해주듯 반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9시 출근하여 조선일보 다 읽고, 10시에 중앙일보 보고, 11시에 동아일보 훑고, 12시에 지난밤 업자의 술대접으로 속이 쓰리니 해장국집으로 갑니다. 1시에 사우나가서 땀 좀 흘리고 사무실에 들어가 여기저기 전화해서 저녁 식사 약속하고 퇴근합니다. 국민연금은 적자 난다고 줄이면서 공무원 연금은 매년 적자 수조 원을 국민의 세금으로 메꿔줍니다. 공무원일 때도 신분을 보장해 주지만, 은퇴해도 국민이 돈을 거둬 경제적 책임을 보장해 줍니다. 공무원 신분보장을 없애지 않으면 국가 개조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만 확실히 국민 의식 속에 박힌다면 한국 국민 의식은 선진국이 되고도 남습니다.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이 생명을 위협받으면 무의식적으로 ‘사람 살려!’ 또는 ‘살려주세요!’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어른들이 기다리라고 했으니 살려줄 것으로 믿고 ‘살려주세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좀…’하는 것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소리를 부모는 평생을 귓가에 담고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는 길은 딱 한 가지입니다.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니 지금 한꺼번에 모두 아파할 게 아니라 조금씩 나눠가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결국, 슬픔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색깔이 조금 연해질 뿐입니다. 세월이 약입니다.

어린 왕자는 소행성 B612라고 하는 별에서 삽니다. 별이 되어 어린 왕자 곁으로 간 우리의 왕자와 공주들, 어린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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